
약 일주일간에 걸쳐 전설적 미국 드라마라 불리우는 <브레이킹 배드>를 다 봤다.
매우 독특한 드라마였고 왜 전설이라 말하는지 알 것 같기는 한데, 상당한 피로감이 몰려오는 것도 사실이라 작품의 완성도와는 별개로 추천을 해야 하나 망설여진다. 완성도는 두말할 나위없이 10점만점에 9점이상이다. 다만 시청내내 끓어오르는 짜증을 이겨내야 한다. 이 짜증은, 드라마 내내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주인공(월터 화이트)과 주인공 가족(아내 스카일라 화이트, 아들 월터 주니어, 처제 마리 슈레이더, 제부 행크 슈레이더), 그리고 피를 나눈 가족은 아니지만 작품 전편에 걸쳐 아들 역할을 하는 제시 핑크맨 때문이다.
두시간 짜리 영화도 아니고 약 60시간에 걸친 드라마이다. 드라마를 이끌고 가는 누군가에겐 감정이입을 해야 한다. 보통은 주인공이다. 그런데 이 주인공이 열등감에 가득찬 찌질한 소심남이면서 자존심은 엄청나게 센, 게다가 맨날 가족을 입에 달고 사는 폐암말기 이과 출신의 완고한 중년남이다. 감정이입이 너무 힘든 반면, 결정적으로 연기를 너무 잘해서 몰입할 수 밖에 없다.
참고로 몰입과 감정이입은 다른 영역이다. 몰입은 해당역할을 하는 배우의 연기가 훌륭해 극에 빠져드는 것을 말한다. 감정이입은 연기와 관련없이 배우의 캐릭터에 자신의 처지를 투영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이 둘은 대부분 비슷하게 발현된다. 캐릭터가 연기를 너무 잘해 몰입되는데, 극 중 캐릭터의 심정이 (가령 나의 옛날 모습을 보는 듯 하다는 상투적 말들?) 이해가 팍팍되는 그런 경우로 말이다. 하지만 <브레이킹 배드>는, 물론 이것 역시 감독 및 작가의 의도라고 생각하지만, 이 두 영역을 완전히 분리시켜 놓는다. 배우의 연기가 너무나 훌륭해서(몰입), 이 극중 캐릭터의 언동에 진심으로 짜증이 솟구치는 것(감정이입이 안됨)이다.
이게 주인공 혼자만 그러면 모르겠는데 주변인물들이 다 그렇다. 설정 자체가 주인공인 월터가 메스암페타민을 만드는 걸 비밀로 해야하기 때문에 충분히 그럴 수 있지만, 시청자들은 그 비밀을 알고 있는 상태에서 월터와 가족들 간의 대화를 지켜봐야 한다. 답답하기 그지없고, 마냥 혈압이 솟구친다. (스카일러 정말 짜증 원탑인데 시즌1에선 임산부로 등장하는지라 욕도 못하고 그야말로 미쳐버리고 환장한다. 근데, 이것도 스카일러가 다 연기를 잘 해서 그런 거다. 시즌4에서는 일부러 살을 찌웠다고 생각하는데 히스테릭한 모습을 보여줄 때 출렁거리는 이중턱이 정말 얼마나 열받던지...)
극중 중요한 인물이자 이 드라마의 후속영화판인 <엘 카미노>의 주연으로 등장하는 제시 핑크맨도 진심 짜증의 결정판이다. 시즌 4부터는 제시 핑크맨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기도 할 뿐더러 통쾌한 모습을 보여주는 부분도 있지만, 거기까지 가는 과정은 그야말로 인고의 과정을 거쳐야한다. 아마 제시 핑크맨 때문에 시청을 관둔 사람도 엄청나게 많지 않을까 생각한다.
월터 화이트와 제시 핑크맨의 관계를 설정하면서 시간이 흐를수록 정키였던 제시가 인간이 되어가고, 월터가 악마가 되어가는 과정을 잘 묘사한 점을 높게 평가하는 사람도 많고 나도 주제의식 측면에선 매우 상징적인 전개라고 보긴 하는데 문제는 보는 관객 입장에선 초반부엔 제시 때문에 짜증이 난다는 거다. 월터가 좀 시키는대로 하라고! 이 약쟁이 정키 새끼야!! 라는 말이 현실로 터져 나온다. 실제로 모니터 몇 번을 때렸는지 모를 정도다.
그러다보니 빌런들에게 감정이입을 해버리는 경우가 생긴다. 시즌5에 등장하는 빌런 잭슨 일당은 전형적인 일차원적 빌런이었기 때문에(이 시즌에서는 이미 월터가 초강력 빌런이라 일차원적 빌런이라도 상관없고, 오히려 전형적인 빌런들이 나와서 시청하기 편했다.) 차치하더라도 시즌2 후반에 처음으로 등장한 후 시즌3를 거쳐 시즌 4의 그 장엄한 엔딩을 장식하는 구스타보 '거스' 프링이나 그의 충실한 부하 마이크, 그리고 사울 굿맨 등에 감정이입을 해버리는 경우가 생겨난다. 제작진도 이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모를리가 없다) 이후 스핀오프작 <베터 콜 사울>을 만들지 않았나 싶고, 이 시리즈로 꽤 히트를 치고 있다.
이 모든 원인은 마약이 극의 가장 중요한 소재이면서, 그 무대가 <나르코스>나 카르텔이 아닌 보통의 평범한 가족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일이라 그렇다. 드라마가 아니라 내 주변에서 일어날 수 있다는 핍진성이 큰 작용을 한다. 그냥 <나르코스>라면 나와 별로 상관이 없이 그냥 보면 되는데 이 드라마는 마음 편하게 볼 수 없다.
끊임없이 등장하는 '가족'이라는 전통적 가치와 '법치주의'라는 또다른 전통적인 근대의 가치가 정면으로 부딪힌다. 그 충돌에서 오는 불편한 감정을 아이가 있는 중년가장인 내가 편하게 본다면 그거야말로 정신적인 문제를 의심해야 한다. 물론 인정하긴 정말 싫지만, 그만큼 잘 만들었다는 소리다.
아무튼 제작진의 의도한 주제의식은 잘 알겠다. 뭐냐고 묻지는 마시고(60시간이나 투자한지라 도저히 공짜로는 말을 못하겠다) 스테이홈하면서 정 할일 없는 분들은 보셔도 된다. 누차 말하지만 감히 추천은 못해드리겠고, 평점은 10점 만점에 9점이며, 60십자 평은 다음과 같다.
"전통적 가치와 개인적 자유의지의 경계를 묻는 걸작 드라마, 하지만 추천하지는 않겠다. 정 보겠다면 <기생충>을 60시간 본다는 마음가짐으로 도전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