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2일 소프트뱅크 손정의 회장이 코로나19 바이러스 검사를 할 수 있는 간이진단키트 100만개를 무상기부하겠으며 방법은 지금부터 찾아보겠다는 트윗을 올렸다. 그가 말한 '방법'은 물론 관할부처인 후생노동성과의 협의를 의미한다. 그런데 이 트윗을 올리자마자 그는 숱한 비판, 비난을 들어야만 했다.
그들은 대체로 손정의의 기부가 의료붕괴를 초래한다고 주장했다. 간이진단키트의 정확성 문제도 있고(위양성), 코로나19 바이러스 진단을 받지 않아도 될 가벼운 증상(경증) 의심자들이 일거에 키트 검사를 받아버려 원래는 가만 있어도 스쳐 지나갈 80%의 증상자들이 무분별하게 병원을 찾을 경우 한정된 의료자원과 시스템을 망쳐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일견 일리가 있는 말로 들린다.
그런데 이 비판들에는 근본적인 모순이 존재한다. 근대민주주의 국가, 그것도 의료보험 시스템을 적용하고 있는 나라라면 아플 경우 치료를 받을 수 있는 권리가 있다. 보험료를 내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후생노동성의 다음 페이지에 가면 두리뭉실하게 써놨긴 했지만 증상이 나타난 사람들이라면 지역보건소, 국립감염증연구소, 지방위생연구소 등을 통해 각급 의료기관(병원)에서 보험적용 치료를 받을 수 있다고 써놨다.
(https://www.mhlw.go.jp/stf/seisakunitsuite/bunya/kenkou_iryou/dengue_fever_qa_00004.html)
하지만 지금 돌아가는 논의를 보면 '누구나 아프면 치료받을 권리가 있다'는 것부터 다시 생각해보자는 말이 된다. 의료붕괴가 될지, 안될지 해 보지도 않고 무조건 의료현장은 붕괴되고, 코로나19 검사를 하게 되면 더 긴박한 상황에 놓인 사람들이 치료받을 수 없다는 가설만을 제시한다. 더 긴박한 사람이 누군지 모르겠는데, 저 말만 떼어놓고 보자면 코로나 바이러스에 걸린 사람은 죽어도 된다는 소리다.
게다가 이들은 아베정권을 비판하지 않는 경향을 띠고 있다. 애초에 정부가 의료환경 시스템을 체계적으로 확대시키거나 마련하지 못한 점을 비판해야 하는 것 아닌가. 중국 한국발 입국자들을 격리하겠다고 말했을 때도 그렇다. 격리시설조차 없으면서 격리하겠다고 아무 생각없이 말했다가 결국 요청으로 후퇴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정부의 문제는 뒤로 제쳐두고 간이진단키트를 후생노동성과 협의하며 어떻게든 공급하겠다는 손정의만 뭇매를 맞았다. 본말전도라고 할 수 있다.
이번 코로나19 뿐만이 아니다. 잃어버린 20년의 영향이 크다. 혹자는 그래도 노벨상은 일본이 매년 타지 않냐고 하는데, 그 노벨상 연구를 보면 풍족했던 고도성장기, 그리고 버블시대에 이뤄졌던 것들이 대부분이다. 일본대중문화가 전세계의 주목을 받거나 트렌드를 이끌었던 시기도 결국 80-90년대 버블시대다.
그 이후가 중요하다. 잃어버린 20년을 지나오면서 일본이 이뤄낸 것은 과연 무엇인가. 디플레이션의 시대를 지나오면서 창의력과 도전의식은 사라졌고, 소극적인 사고방식은 '치밀함'으로 둔갑됐다. 그러한 전체적인 경향 덕분에 어찌보면 나같은 외국인들이 여기서 기반을 굳건히 하고 살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다들 안하려는 것들을 하기 때문이다.
손정의 사장, 그리고 유니클로의 야나이 사장은 2019년 일본 제조업의 미래가 없다고 말한 바 있다. 당연하다. 제조업이야 말로 챌린지 정신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정 안되면 국가적 차원에서 푸쉬를 해야 하는데, 정작 아베정권은 '관광대국'을 말하고 있고 작년에는 한국에 관한 수출규제 정책으로 자국의 잘 나가는 제조업 중견기업을 망치려고 했다. 이 정권의 비일관성은 조금만 생각하면 금방 알 수 있는데도, 유권자들은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정치혐오에 빠져 있다. 전문가랍시고 나오는 평론가들은 손정의는 비판해도 아베는 비판하지 않는다.
이런 나라에 미래가 있다면 그게 더 신기하다. 또 그렇기 때문에 나는 더더욱 착잡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