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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일본 최단 재임 총리에 대해 알아보자.

by uenotetsuya 2022. 10. 21.

10월 20일 리즈 트러스 영국 총리가 취임 45일만에 전격사퇴한 김에 일본의 최단기 재임 총리에 대해서 한번 알아보았다. 

 

먼저 일본인들이나 일본정치에 관심많은 한국인들은 아마 하타 쓰토무 총리로 알고 있을 확률이 꽤 높다. 하지만 하타 쓰토무 총리는 64일로 2위이다. 그럼 하타 총리를 이긴 1위는 과연 누구일까.

 

정답은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 총리인데, 이 양반의 재임기간은 불과 54일(1945년 8월 17일부터 그 해 10월 9일까지)이다. 이 사람이 가진 또 하나의 기록은 최단기간 "육군대신"으로 딱 일주일 했다. 이름과 그 시기에서 보다시피 구황족 출신으로  당시 그가 맡았던 임무는 '패전처리'였다. 그래서 그의 내각을 '종전처리내각'이라 부르기도 한다. 근데 또 웃긴 게 사람 자체는, 당시로서는 상상을 초월할만큼 오래 살았다. 1887년에 태어나 1990년 버블 최전성기에 죽었으니 102년이나 생존한 것이다. 총리로선 최단명인데, 수명으로선 최장수... ㄷㄷ

 

아, 오해를 하면 안된다. 사실 '내각'으로만 따진다면 최단명 내각은 현 총리인 기시다 후미오의 제1차 내각이다. 2021년 9월 자민당 중의원 해산없이 자민당 총재선거를 통해 당선된 기시다 총리는 바로 제1차 내각을 구성했지만  38일만에 내각을 총해산한 전력이 있다. 하지만 기시다를 최단명 총리라곤 부르지 않는다. 왜냐, 이 선거에서 자민당이 압승을 거둬 순조롭게 기시다 제 2차 내각이 들어섰기 때문이다. 

 

히가시쿠니노미야는 격변기의 황족이면서 본인 자체가 육군대장까지 올랐던 전력 때문에, 그의 이력만 본 사람들은 태평양전쟁의 전범 중 하나로 취급하는 경향이 있는데, 사실 그는 당시 강경파들이 득세했던 대본영의 거의 유일한 비판자였고, 특히 동남아 진출을 끝까지 막았었다. (물론 실패했다.)

 

참고로 일본 현대사의 터닝포인트로 1941년 10월을 꼽는 연구자들도 간혹 있다. 이 때 제3차 고노에 내각이 총사퇴를 했는데, 히가시쿠니노미야가 차기 총리 후보로 거론됐던 시기다. 만약 대미전쟁회피를 지속적으로 주장해온 비둘기파이자 리버럴이었던 그가 수상이 되는게 좋다는 세력들이 있었고, 진짜로 그가 수상직에 오를 뻔 했다. 초강경파인 도조 히데키조차 그가 '육군성' 출신이란 이유로 지지했고, 고노에 후미마로, 히로타 고키 등 해군성의 온건파들도 파벌 대립을 넣어 그를 지지했다.

 

하지만 당시 막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던 내대신(内大臣, 지금으로 치자면 그냥 '궁내청' 이지만 당시엔 황실과 관련된 모든 것을 관장하는 부서로 내각에도 힘을 발휘했다) 기도 고이치가 "황실에 더이상 누를 끼쳐선 안된다"고 격렬하게 반대해 결국 같은 육군성 출신의 도조 히데끼가 총리대신으로 임명, 그 이후는 다들 알다시피...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만약 그가 1941년에 내각총리대신이 되었다면 아마 태평양전쟁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다시 한번 더 생각해보면 태평양전쟁이 없었다면 41년 당시 이미 일본의 식민지였던 조선이 과연 독립할 수 있었을지도 의문이긴 하다. 일본이 그 전쟁을 일으켜 패전했기 때문에, 조선 역시 독립할 수 있었다. (나는 조선민중의 자체적 독립운동만으로 식민지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건 힘들다고 생각한다. 물론 선조들의 독립운동을 폄하하진 않고 언제나 존경하고 있다.)

 

간단하게 쓰려 했던 게 길어졌는데, 아무튼 일본의 최단명 총리는 하타 쓰토무 총리가 아니라 히가시쿠니노미야 총리. 그리고 내각으로만 따지자면 제1차 기시다 내각이 38일로 최단명이라는 사실을 여기에 메모해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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